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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 씨네21에서 - 나도 이렇게 표현할 수 있다면

딸리는: 치아키에게 고백을 받은 마코토가 어쩔 줄 몰라 그 사태를 없었던 일로 무마하려고 여러 번 타임 리프를 하잖아요? 그때 “고백을 함으로써 좋아하게 되는 경우도 있잖니”라고 이모가 충고하는데 공감했어요. 고백을 하고 나서야 고백한 사람도 받은 사람도 비로소 사랑의 감정을 접수하는 예가 있죠. 감정이 언어를 입으면서 물질성을 얻는다고 할까, 한번 던져진 말은 그리로 생각과 감정의 물길을 터주잖아요. 그를 좋아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좋아하는 걸까, 의미를 부여하고 감정의 강도를 점수 매기고 거기 비추어 상대의 반응에 실망도 하고 기뻐도 하고.
같다면: 언어가 감정을 끌어내는 경우는 아주 많죠. 고백은 일종의 주술 같은 거예요. 언어에는 주술적인 힘이 있어서 어떤 감정을 담은 말을 하게 되면, 그 감정이 생기는 일이 있죠. 그런데, 어찌 보면 성장이란 결국 시간을 뛰어넘는 것 아닌가요? <시간을 달리는 소녀>는 그런 부분을 영화적으로 절묘하게 표현한 작품이었습니다. 오늘 다룰 영화가 5편인데, 이러다간 타임 리프를 해야 할 지경이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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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글을 굳이 여기까지 옮겨와 두는 건 가능한 한 하고 싶지 않았지만,
한참 전에 '발가락이 닮았다'를 인용하며 내가 하고 싶던 말을 너무 정확하게 하고 있어서
퍼 와 봤다. (사실 저 글이 좀 길잖나.)
"감정이 언어를 입으면서 물질성을 얻는다"라니,
아, 참~~~ 부럽고나.

by 바둥2 | 2007/06/26 17:20 | 우물 | 트랙백 | 덧글(0)

[소설] 발가락이 닮았다, 김동인

(소설 전문을 누군가가 다 올려놨던데, 이런 거 링크해도 되나 모르겠다)
월급쟁이가 월급을 받았네. 받은 즉시로 나와서 먹고 쓰고 사고, 실컷 마음대로 돈을 썼네. 막상 집으로 돌아가는 길일세.
지갑 속에 돈이 몇 푼 안 남아 있을 것은 분명해. 그렇지만 지갑을 못 열어 봐.
열어 보기 전에는 혹은 아직은 꽤 많이 남아 있겠거니 하는 요행심도 붙일 수 있겠지만
급기야 열어 보면 몇 푼 안 남은 게 사실로 나타나지 않겠나? 그게 무서워서 아직 있거니, 스스로 속이네 그려.
쌀도 사야지. 나무도 사야지. 열어 보면 그걸 살 돈이 없는 게 사실로 나타날 테란 말이지.
그래서 할 수 있는 대로 지갑에서 손을 멀리하고 제 집으로 돌아오네. 그 기모찌 알겠나?
- 김동인의 "발가락이 닮았다" 중에서 -
이 소설을 읽은 것은 중학생 때였던 거 같은데,
(집에 김동인 전집이 있었다. 비록 세로판이었지만)
다시 읽어보니 내 기억에 비해 소설이 참 구구절절하구나, 싶다.
줄거리도 잘 기억나지 않는 이 사내에 대해서 나는 꽤 오랫동안 고민해 왔다.
세상에 용기있게 맞서기보다, 주저주저하며 어려운 상황을 그저 회피하고 싶어하던 소심한 나는
이 사내의 고민에 대해 정말 공감한 적이 많았다고 해야 할까.
어떤 상황을 확실하게 확인하기가 두려운 마음. 아닐 수도 있다는 1%의 확률에 희망을 걸어보고 싶은 마음.
아직은 애매모호한 상황에서 말이나 글로 그 상황을 정리했을 때
그 말 한 마디나 글 한 줄이 갖는 힘은 굉장한 것이다.
그러니까, 확인이라는 것이 굳이 검사를 하거나 누군가의 증언을 듣거나 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혼자서, 아니면 다른 이에게 정리되어 표현되는 순간
그것은 그 때부터 독자적인 추진력을 갖게 되는 것 같다.
그것이 나는 무서웠었다. 그래서 외면했었다.
그런데, 과연 그것이 현명했던가, 요 며칠 계속 머리 아프게 고민하고 있다.

by 바둥2 | 2007/02/14 15:17 | 너에게 가는 길 | 트랙백 | 덧글(0)

[영화] 올드미스 다이어리

새해 첫 출근한 날.
퇴근하고서 올드미스 다이어리를 봤다.
(영화정보는 이 곳으로)
TV 드라마의 팬이었던 터라 (비록 성실한 팬은 아니었지만)
오랜만에 그 등장인물들을 다시 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중간 이상의 점수는 주고 싶다.
킥킥 웃어가면서, 즐겁게 두 시간을 보내고 나올 수 있는 영화였다.
그러나, 원작을 아끼는 사람의 입장에서 늘 원작보다 나은 리메이크는 없는 법인가.
그 긴 드라마 시리즈를 두 시간짜리 영화로 압축하자면 어쩔 수 없이 생기는 것이겠지만,
우선 캐릭터와 사건들이 너무 극적인 과장이 심하다는 점이 아쉽다.
특히 미자 삼촌의 은행강도 사건은 약간 이질적일 만큼 어색했고,
귀여운 지피디의 태도 변화도 내게는 좀 갑작스러웠다.
그리고, TV를 보면서 오윤아의 캐릭터도 참 좋았었는데
역시 영화화하면서 어쩔 수 없는 선택이긴 했겠지만,
세 친구의 이야기가 빠진 것도 아쉽다.
할머니 3인방은 살렸는데, 30대 3인방은 빠져 버렸다.
일상의 소소한 유치함과 감동을 그 3인방을 통해 공감가게 그려내는 게 참 좋았었는데...
그래도, 물론 그 인물들에 애정을 가진 사람의 평이니 편견이 가득하겠지만,
내 동년배의 이야기를 보는 것은 재미있고 유쾌하다.
30대의 노처녀들이 그려지는 역할이 처음에는 예쁘고 성공한 커리어우먼이거나(주인공인 경우)
아니면 이쁘고 착하고 능력있는 20대 청순가련 여주인공을 괴롭히는 못된 마귀할멈이었다가(이게 다반사였지)
점점 예쁘지도 않고 청순가련하지 않지만 뛰어난 능력이 있거나(김삼순, 사실 예쁘기는 예쁘지),
아님 그냥 직장에 다니고 있는, 특별히 능력이 뛰어나지도 않은 여성이거나(여우야 뭐하니)
미자처럼 직장도 비정규직이라 위태하고, 능력도 구박 당하며, 예쁘지도 섹시하지도 않은
보통의 여자들로 점점 진화하고 있다. (이게 뭐 진화냐고 토를 달진 말아 주시라)
그래서, 마지막에 스피커를 든 미자의 외침은 가슴에 와 닿는다.
왜 특별히 나쁘게 대한 적도 없는데 예의를 안 지키냐는 말, 왜 함부로 대하느냐는 절규.
영화를 보고 나와 떡볶이를 먹으면서 생각했다.
조금 더 용기를 가지고 살아야겠다, 라고.
짝사랑을 앓을지언정 누군가에게 먼저 '당신이 좋다'하는 고백을 해 본 적이 없는 것 같다.
거절당할 것에 대한 두려움? 그것이 되게 쪽팔릴 것 같다고 생각했는데,
이제는 미적미적, 말 한 번 건네보지 못하고 끝내버린 내 태도가 더 유치하다는 생각을 한다.
미자처럼 유치한 착각도 하면서(나중에 착각이 아닌 걸로 밝혀지긴 하지만)
용기있게 내 마음을 전해보는 것. 다음에 꼭 한 번 해 보고 싶다.
물론 그런 사람이 나타나느냐가 문제겠지만. (흑흑)
여튼 새해가 밝은 지도 일주일이 지났다.
새해부터는 좀 현실적으로 삶을 꾸려야겠다고 생각했는데,
서른 넷이 되면 인생의 제 2막이 시작된다는 사장님의 말씀을 듣고 나니
아직 1막인 나는 올해까지는 좀 열심히 놀아줘야 하는 건가, 고민에 빠졌다.

by 바둥2 | 2007/01/08 00:03 | 너에게 가는 길 | 트랙백 | 덧글(4)

[책] 사람풍경(김형경), 내안에 접혀진 날개(리처드 로어)

한 달 전쯤인가, 언니랑 크게 다퉜다.
그러고 나서 한 일주일쯤 마음이 불편했던가, 주말에는 결국 아프기까지 했다.
(나이들수록 뼈저리게 느끼는 건, 마음과 몸은 정말 하나라는 사실이다)
내 마음을 다시 들여다보고, 또 언니를 이해하고 싶기도 하고,
하여 <내안에 접혀진 날개>라는 책을 다시 꺼내 들었다.
이 책은 일이년 쯤 전에 언니가 읽어보라며 준 책이다.
애니어그램에 대한 책으로 리처드 기어라는 가톨릭 신부님의 강연(?)을 누군가가 책으로 엮었다.
6유형에 대한 부분을 펴고 다시 한 번 천천히 읽어본다(언니가 6유형이다).
9유형에 대한 부분도 다시 한 번 읽는다. 묘사된 나는 익숙하기도 하고 민망하기도 하다.
내 주변의 사람들을 떠올리면서 1~9유형까지 전체적으로 다시 쭉 읽어본다.
내가 쉽게 빠질 수 있는 함정과 유혹, 혹은 누군가가 가지고 있는 더 예민하고 상처받기 쉬운 어떤 부분들.
그리고, 또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건강한 점들.
애니어그램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하지만, 꽤 동양적인 성격유형론이다.
사람을 구별하는 것이 아니라, 성장 혹은 성숙을 이야기한다는 것이 좋다.
그리고, 김형경의 <사람풍경>.
이 책은 사 둔 지 꽤 오래 되었는데
막상 읽으려니 마음에 부담이 되어 자꾸 미뤄두었다가, 이제서야 읽게 되었다.
이 책은 집을 팔아 떠났다던 세계 여행에 대한 그녀의 여행기이다.
그러나, 다른 여행기처럼 여행지나 풍속, 만난 사람 등에 대한 정보는 거의 없다.
그녀가 여행 동안 보고 와서 이 책에 담은 부분은
여행지에서 맞닥뜨린 자신의 깊은 마음 속 풍경에 대한 이야기이다.
무의식, 사랑, 분노, 우울, 불안, 공포 등의 기본적인 감정들과
그런 감정 속에서 생존하기 위해 선택된 의존, 중독, 질투, 투사, 회피 등의 방어기제들,
그리고, 어른이 된 내가 아직 상처입은 아이로 멈춰서 있는 나를 돌보아주면서 성장할 수 있는
자기애와 자기존중, 몸사랑, 공감, 용기, 인정 등의 긍정적인 가치들.
어렵고 딱딱할 수도 있는 이 심리학적 개념들을 그녀는
자신의 상처와 경험을 통해 하나하나 친절하고 쉽게 이야기해 나간다.
그리고 그 이야기 속에서 나를 들여다보게 한다.
내가 나에게 스스로 억압하고 있는 것들.
내가 나에 대해 가지고 있는 "좋은 사람", 혹은 "괜찮은 사람"에 대한 어떤 이미지.
이제 나는 전지현처럼 "나쁜 여자"가 될지도 모르겠다.
자신의 욕망을 억압하는 것에 대해서만 너무 열심히 교육받아 온 탓에 그리 쉬운 일은 아니겠지만,
나이가 들어가면서 조금 더 세상에 투명해지고 건강해지기 위해서는
나를 더 깊이 들여다보고, 나를 더 위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김형경만큼 나도 성장한 "어른 여자"가 될 수 있을까?
어제 퇴근길에 과장님이 "남자들은 배려라는 걸 잘 모르는 것 같아"라고 하시기에
"여자들이 너무 잘 아는 것일지도 몰라요"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나만"을 돌보는 것도 문제지만 "너만"을 돌보는 것이 더욱 무서운 기만일지도 모르겠다.
조금 더 정직하게 살아야겠다.
덧1. 다음에는 김형경의 유머를 읽고 싶다. 야하고 뻔뻔해졌으니, 이제 농담도 할 수 있을까?
덧2. 사실은 나에게 기대하는 것이다. 이젠 그만 좀 진지한 척 하고 유쾌해져 보자구.
덧3. 업뎃도 거의 없는 심심한 곳에 종종 들러주시는 분들, 고마워요^^

by 바둥2 | 2006/11/10 15:47 | 너에게 가는 길 | 트랙백 | 덧글(0)

[책] 김훈, 그리운 것들 쪽으로

술을 억수로 마신 다음날 아침에 누는 똥은 불우하다. 똥이 항문을 가득히 밀고 내려가지 못하고, 가락국수처럼 비실비실 새어나온다. 똥이 똥다운 활력을 잃고 기신거리면서 툭툭 끊긴다. 이것은 똥도 아니다. 삶의 비애는 창자 속에 있었다. 이런 똥은 단말마적인 악취를 풍긴다. 똥의 그 풍요한 넉넉함이 없이, 이 덜 썩은 똥냄새는 비수처럼 날카롭게 주인을 찌른다.
간밤의 그 미칠 듯한 슬픔과 미움과 무질서와 악다구니 속에서, 그래도 배가 고파서 집어먹은 두부김치며 낙지국수며 곱창구이가 똥의 원만한 조화에 도달하지 못한 채, 반쯤 삭아서 가늘게 새어나오고 있다. 이런 똥의 냄새는 통합성이 없다. 덜 삭은 온갖 재료들이 저마다 제각기 덜 삭은 비명을 질러댄다. 그래서 이런 똥의 냄새는 계통이 없는 아우성이다. 육신을 통과하면서 육신을 먹여주고 쓰다듬어주며 나온 똥이 아니라 육신과 싸우고 나온 똥이다. 삶은 영위되지 않고, 삶은 살아지지 않는다. 이 악취는 영위되지 않는 삶의 비애의 냄새인 것이다. 이것은 날똥이다. 날똥을 들여다보면 눈물이 난다. 이 눈물은 미칠 듯한 비애의 눈물이다. 날똥 새어나오는 아침의 화장실에서 나는 때때로 처자식 몰래 울었다.
날똥이여,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세월이여 청춘이여 조국이여, 모든 것은 결국 날똥이 되어 가락국수처럼 비실비실 새어나가는 것인가. 쉰 살 넘어서 누는 날똥은 눈물보다 서럽다.
선암사 화장실은 배설의 낙원이다. 전남 승주 지방을 여행하는 사람들아, 똥이 마려우면 참았다가 좀 멀더라도 선암사 화장실에 가서 누도록 하라. 여기서 똥을 누어보면 비로소 인간과 똥의 관계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알 수가 있다.
선암사 화장실은 3백 년이 넘은 건축물이다. 아마도 이 화장실은 인류가 똥오줌을 처리한 역사 속에서 가장 빛나는 금자탑일 것이다. 화장실 안은 사방에서 바람이 통해서 서늘하고 햇빛이 들어와서 양명(陽明)하다. 남자 칸과 여자 칸은, 서양 수세식 변소처럼 철벽으로 가로막힌 것이 아니라, 같은 건물 안에서 적당한 거리로 떨어져 있다. 화장실의 남녀 칸을 철벽으로 막아놓은 것이 문명이 아니다. 화장실 남녀 칸의 관계가 어떠해야 하는지는 선암사 화장실에 정답이 있다. 그것은 자연스럽게 떨어져 있어야 하는 것이다.
선암사 화장실은 변소의 칸막이 담이 높지 않다. 쭈그리고 앉는 사람의 머리통이 밖에서 보인다. 똥을 누는 일은 드러내놓고 할 수 있는 일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파트 변소처럼 감옥 같은 공간에 갇혀서 해야 할 일도 아닐 성싶다. 똥을 누는 것은, 배설물을 밖으로 내어보내는, 자유와 해방의 행위다. 거기에는 서늘함과 홀가분함이 있어야 한다. 선암사 화장실은 이 자유의 낙원인 것이다. 이 화장실에 앉으면 창살 사이로 꽃핀 매화나무며 눈 덮인 겨울 숲이 보인다. 화장실 위치는 높아서 변소에 앉은 사람은 밖을 내다볼 수 있지만, 밖에 있는 사람은 안을 들여다볼 수 없다.
똥을 안 눌 때 똥누는 사람을 보는 일은 혐오스럽지만, 똥을 누면서 창살 밖으로 걸어다니는 사람들을 바라보는 일은 계면쩍고도 즐겁다. 이 즐거움 속에서 배설 행위는 겸손해진다. 햇빛은 창살을 통해서 화장실 안으로 들어온다. 빛은 굴절되어서, 화장실 안에서 직사광선이 들어오지 않고 늘 어둑어둑하면서도 그늘이 없다. 바람이 엉덩이 밑을 스치고 지나간다. 그래서 엉덩이가 허공에 뜬 것처럼 상쾌하다. 똥을 누기가 미안할 정도로 행복한 공간이다.
이 화장실에서도, 심하지는 않지만 냄새가 조금 나기는 한다. 이 냄새는 역겹지 않다. 이 냄새에는 잘 처리된 배설물의 은은함이 있다. 건강한 몸이 음식물을 아름답게 처리해내듯이 이 놀라운 화장실은 인간의 몸 밖으로 나온 똥을 다시 아름답게 처리해낸다. 그것은 수세식 변소처럼 물로 씻어서 강물로 흘려보내는 것이 아니라, 똥으로 하여금 스스로 삭게 해서 똥의 운명을 완성시켜준다. 화장실 밑에는 나무 탄 재와 짚을 늘 넉넉히 넣어두어서, 배설물들은 이 두엄더미 속에서 삭으면서 오래된 것들의 오래된 냄새를 풍긴다. 이 냄새는 풍요하고, 이 냄새는 사람을 찌르지 않는다. 똥의 모습과 똥을 처리하는 분명한 방식과 똥의 냄새는 마땅히 저러해야 하리라.
선암사 화장실에서 나는 잃어버린 삶의 경건성과 삶의 자유로움과 삶의 서늘함을 생각하면서 혼자서 눈물겨웠다. 아, 그리운 것들은 아직도 죽지 않고 살아 있었구나. 그러니 그리운 것들이 살아 있는 동안에 그리운 것들을 향해서 가자. 가자. 가자. 무릎걸음으로 기어서라도 기어이 가자. 그것들이 살아 있는 한, 내 마침내 그곳에 닿을 수 없다 하더라도 내 사랑은 불우하지 않으리.
사랑이여, 쓸쓸한 세월이여, 내세에는 선암사 화장실에서 만나자.
- 김훈 에세이, <자전거 여행> 중 "그리운 것들 쪽으로" 전문 -
감상1. 훌쩍~,에 대한 갈망을 이렇게 달래는 중.
작년에 맘먹었던 제주도 자전거 일주는 과연 언제쯤 할 수 있을까.
감상2. 은희경의 <빈처>라는 단편이 떠오른다. 그 책에도 "똥"에 대한 소고가 들어있었지.
감상3. 김 훈 아저씨(?). 예전에 <화장>이라는 단편을 읽을 땐 잘 몰랐는데... 참 글을 단단하게 잘 쓰신다.
그저 부러울 따름.

by 바둥2 | 2006/09/08 14:58 | 내마음에 콕콕 | 트랙백 | 덧글(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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